9월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초청

기사입력 2019.09.26 11:01 조회수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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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영웅 등 미국, 터키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 한국 방문한다.
                 - 9월‘유엔참전용사’재방한 초청 -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오는 26일(목)부터 5박 6일간 미국, 터키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77명*이 대한민국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 방한 인원 : 미국 58명(본인 23명, 가족 35명), 터키 19명(본인10명, 가족 9명)


  ○ 미국 참전용사와 가족들은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가 주관하는 ‘장진호 전투 영웅 추모행사(27일)’에 참석하여 전우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며,


  ○ 터키 참전용사와 가족들은 경기도 군포시와 용인시에 소재한 참전기념비 등을 방문하여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큰 용기를 보여준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군포시가 개최하는 위로 오찬(27일)에 참석할 예정이다.


□ 특히, 이번에 방한하는 참전용사 중에는 6·25전쟁 중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포함되어 있어 재방한의 의미를 더한다.

 * 장진호전투 :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군 제1해병사단 1만 5천명이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7개 사단 12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지역으로 철수에 성공한 작전이다. 한편 작전 중 미 해병 4천 5백여 명 전사하고 7천 5백여 명이 동상을 입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흥남철수 작전 :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Meredith Victory)'에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한 것으로, 이 작전으로 10만여 명이 무사히 흥남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이에 대한 참전용사의 주요 스토리는 아래와 같다.


◎ 밀튼 워커(Milton Walker, 장진호 전투 참전)
 (참전기간: 1950년 8월~1951년 5월, 소속?계급 : 미 해병 상병)

워커씨(만89세)는 고등학교 졸업 후 1948년 9월 해병대 입대하여 1950년 8월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지프차를 몰며 전방에 있는 전방관측 장교에게 통신장비를 전달하는 등의 작전을 수행하며 그 당시 한반도 남쪽을 방어하던 미 육군을 도왔다고 한다.

한번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날 밤 주스, 쿠키, 사탕 등을 지프 구석구석에 숨겨뒀으나, 그 다음날 습격을 당해 지프가 완전 박살이 났던 일화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미 해병 1사단과 함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한강을 건너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위쪽으로 북한군을 밀어내기 위한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 동해쪽으로 이동하여 북한의 원산에 정박한 뒤 장진호로 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이렇게 상기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중국까지 진격하길 원했던 것 같았어요. 당시 지휘관은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었는데 정찰대는 미 해병 1사단이 배속되었던 제10군단에게 계속 북한에 중공군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같았어요. 장진호 북서쪽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근방에 중공군이 많다는 사실을 늦게 깨닫게 되었고, 산을 오를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숙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가 되었지요”

“약 150,000~200,000명의 중공군과 북한군이 있었고 우리 병력은 10,000~15,000명밖에 되지 않아 수 적으로 매우 불리했어요. 거의 대부분의 전투는 밤에 치러졌고 중공군은 공격하기 전 호루라기와 나팔을 불어댔는데 그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소리였어요.”

“식량, 의약품, 탄약 등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게 다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공중투하로 받은 보급품으로 4~5일 더 견디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부대원이 모두 함께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은 후퇴 였어요”

“우리 해병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후퇴하지 않기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함흥-원산 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후퇴하는 것이 더 어려웠죠. 날씨는 갈수록 추워져 영하 25~40도의 극한 추위에 강풍이 불고 눈도 내렸죠. 우리를 포위했던 중공군이 우리 진지 남쪽에 있던 다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이 더 험난했어요. 하지만 공군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어요, 아마 공군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지도 못했을 겁니다. ”

“우리 병력의 60~70%는 적군과의 교전과 극심한 추위로 인해 대부분 사망했어요. 나머지 병력은 계속해서 이동하는데 에만 집중하였고 다행히도 우리는 사단 본부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손과 발은 동상에 걸린 채 21일 동안 차가운 전투식량과 크래커, 쿠키, 주스로만 배를 채웠죠. 당시 한 가지 재밌는 해프닝이 있었어요. 박격포 병들이 포탄을 “투시 롤(미국 초콜렛 사탕)”이라고 불렀는데 공중투하를 담당하는 부대에게 “투시 롤이 부족하니 더 보내달라”고 말하자 포탄이 아닌 진짜 투시 롤을 공중투하로 보내줬고, 초콜렛 사탕을 보며 모두가 신났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네요.“

“당시 우리가 있던 곳에는 약 100,000명의 피난민들이 있었는데 이후 부산에서 다시 정박하고 북쪽으로 올라가 38선 위쪽까지 전진했어요.” 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후 1951년 5월 중순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 헨리 쉐이퍼(Henry Schafer, 장진호 전투 참전)
 (참전기간: 1950년 9월~1950년 12월, 소속?계급 : 미 해병 병장)

쉐이퍼씨(만88세)는 1948년 미 해병대 예비군에 입대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 인천과 김포공항을 지나 한강을 건너 서울에 도달하여 북한군을 38선 위쪽으로 밀어내는 전투에 참전했다.

“끔찍한 전투였어요. 날씨는 너무 더웠고 밭을 지나면 비료 냄새가 진동했죠.”

“당시에는 북한군을 38선 위쪽으로 격퇴시켰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다고 당시 생각했고. 참전 중 10월에 생일을 맞이하기 며칠 전 쉐이퍼씨는 조카에게 “내가 19번째 생일을 무사히 보내게 되면 아마 80살까지 살 수 있을 거야”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어요.”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12월 1일, 유담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던 아군은 철수 명령을 받았고 쉐이퍼씨는 그 소식을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사람이었다. 참호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뛰어가던 중 미국 경  기관총으로 무장한 중공군이 쉐이퍼씨를 향해 총을 쐈고 양쪽 팔에 총 세 번의 총상을 입은 쉐이퍼씨는 언덕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옆구리 쪽에 총상을 입고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던 그를 본 다른 해병이 그를 끌고 언덕 아래까지 내려와 지프 트레일러에 실었다. 트레일러 안에서 쉐이퍼씨는 모르핀을 맞았고 종부성사(죽음 의식)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 치료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 13번의 수술을 받은 그는 결국 한쪽 팔과 다리, 발의 일부분을 절단했다.

그는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고 34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오는 10월에 88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는 그는 “항상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에 대해 큰 자긍심을 느낀다.”다고 전했다.






◎ 웨인 스트렁크 (Wayne Strunk, 흥남철수작전 참가)
 (참전기간: 1950년 9월~1951년 9월, 소속?계급 : 미 해병 병장)

스트렁크씨(만86세)가 6.25전쟁에 참전한지 69년이 흘렀다. 입대 당시 그는 17세였다. 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고 1950년 10월말 경에 북한 이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1950년 11월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중공군으로 인해 대규모 철수 작전이 이뤄졌고,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흥남을 떠나 이후 부산을 향했다.

그는 “참전 당시에는 너무 어렸고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이 나질 않지만, 수많은 피난민과 혹독한 추위를 겪었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전했다.






◎ 프레드 메이슨 주니어(Fred Mason JR.)
 (참전기간: 1950년 7월~1951년 6월, 소속?계급: 미 제25사단 중사)

메이슨씨(만94세)는 1950년 8월 부산에 도착해 마산 남서쪽에 주둔하던 25보병사단 제90야전포병대대에 배속되었다. 1950년 8월 12일, ‘피의 협곡’으로 불리는 사건이 발생해 북한군에 의해 24명이 전사했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었다.

메이슨씨는 “참전당시 늘 남북한 피난민에 대한 걱정을 했어요. 특히 북한에는 강추위가 덮쳤기 때문에 더더욱 염려했지만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북한에서 철수하던 그 과정은 차라리 잊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로 참혹하고 끔찍했어요. 군인들의 시체와 부서진 장비가 뒤섞여 있었고 날씨도 최악이었죠. 70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을 다 기억하긴 어렵지만 가끔 이런 기억들이 떠오릅니다.”라고 회상했다.

메이슨씨는 “한국 국민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으며 한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만큼 6?25전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재방한 소감을 전했다.









◎ 고(故) 레이몬드 크리스먼 (Raymond Chrisman)씨의 유족 샐리 슈켈(Sally Schuckel)
 (참전기간 1952년 11월~1954년 10월, 미 제7사단 상병)

고(故) 크리스먼씨는 제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불모고지전투(Old Baldy), 폭찹고지(Porkchop Hill)전투, 제인러셀고지(김화 오성산)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지역들은 고인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고 한다.

고인의 유족으로 방한하는 샐리 슈켈씨는 “한국이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게 된 바탕에는 참전용사들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했다.

















































































































































































































□ 아울러, 유엔참전용사 및 가족들은 28일(토)에 비무장지대(DMZ)와 임진각을 방문하여 안보현장을 둘러보며 남북분단의 현실을 피부로 체험하는 시간을 갖고,


  ○ 30일(월)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하여 참배하는 시간과 인사동을 둘러본 후, 저녁 18:00부터 보훈처에서 마련하는 감사만찬(그랜드 앰배서더)에 참석한다.


  ○ 만찬 행사는 주한미국대사, 주한터키대사 및 참전용사대표 등이 참석하고, 박삼득 보훈처장의 환영사와 ‘평화의 사도메달’ 수여의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 한편, 유엔참전용사 재방한은 지난 1975년부터 민간단체 주관으로 시작한 후 2010년 6·25전쟁 60주년 사업을 계기로 보훈처에서 주관하면서 공식적인 행사로 참전용사와 유가족을 초청하기 시작했으며,




  ○ 이를 통해 지난해까지 3만 3천여 명의 유엔참전용사와 유가족이 한국을 다녀가는 등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미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출처 :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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